최영배 신부님 묵상카드
2017년 6월 묵상카드

- 단상 2017년 6월 -

눈으로 화를 내지 말고
입으로 화를 내십시요.

사랑의 님이시여,

“화”에는 3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나이다.

첫째는 말로써 내는 화이며
둘째는 눈으로 꼬아보며 내는 화이며
셋째는 온몸으로써 내는 존재적 화이나이다.

입으로 내뿜는 화는
엄마가 자녀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눈으로 내는 화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미움의 표현이며
존재적 화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의 유무를 결정짓는
살생적인 최악의 증오의 산물이나이다.

엄마가 내는 화는 아무리 심해도
자녀들에게 별다른 해를 끼치지는 않나이다.
왜냐하면 그 말 속에 사랑이 깔려있기 때문이나이다.

하지만 눈동자에 힘이 한껏 들어가는 말은
사랑이 전혀 없는 공격적인 화이나이다.

성서에도 “눈은 마음의 거울이다.”하였나이다.

그 다음으로 가장 무서운 화는
‘그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든지 아니면
‘내 눈앞에서 영영 사라지면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자칫하면 행동으로까지 이어지는
참으로 위험한 화이나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무심코 내 뱉은 말 한마디에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하고
아니면 그 말이 가시가 되어
우리 몸속에서 빼내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가기도 하나이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라는 옛말도 있지만
우리는 상대방의 말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을 하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할 필요까지 있겠나이까?

상대방의 말이 그냥 가벼운 입으로 나온 것이라면
그냥 지나치시면 아니되나이까?

그렇게 마음 속 깊은 말이 아니라면
같은 수준으로 말을 주고받으면 아니되나이까?

말의 내용을 따지지 말고
그 사람의 지나온 삶과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삶의 의지적 순수성을 확인하면서
좀 편하게 관계를 이어가면 아니되겠나이까?

눈으로 내는 화는
그 사람의 이중성과 악성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용서와 깊은 이해 그리고 관용 없이는
그냥 지나치기가 참으로 어렵나이다.

그렇더라도 눈의 화는
인간의 본성상 일어나는 화이기 때문에
나의 깊은 사랑으로 감싸지 않는다면
오랜 세월동안 깊은 상처가 되어
나를 고통의 시간들로 밀어 넣을 것이나이다.

이러한 이중성에서 나오는 말은
나도 똑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타인에게 비슷한 상처를 남길 수가 있나이다.

그러하오니 님이시여,
상대방의 이러한 말에 미움과 용서의 선택에 따라
나의 평화와 고통이 결정되오니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 사람에게 등을 돌리지 않으면 좋겠나이다.

마주보고 싸우는 것이 등을 돌린 채
멀어지는 것보다 훨씬 나으나이다.

참으로 무서운 화는 바로 존재적 화이나이다.

첫번째, 두번째 화는 본성적 영역이지만
존재적 화는 참으로 의지적이나이다.

생명과 존재의 유무결정은
오직 절대자만이 행할 수 있는 권리이지
감히 같은 피조물인 나 자신이
끼어들 영역이 분명 아니나이다.

상대방의 말이
아무리 나의 존재와 생명의 유무를 결정짓는
지나친 표현이라도
이는 분명 신의 공간이기 때문에
용서와 미움을 따지지 마시고
아예 못들은 채 무시하셔야 하나이다.

그 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미움과 증오와 갈등으로 많은 세월을 지내다보면
오히려 나의 생명과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지게 되나이다.

암이 걸릴 수도 있고 심장이 망가질 수도 있나이다.
아니면 미움과 증오의 교도소에서
무기징역 상태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나이다.

관용의 님이시여,
님께서는 참으로 인간 같지 않은
저희들을 돌보고 계시지 않나이까?

부디 비가와도 웃고
태양이 떠도 웃으며
하얀 눈 숲 사이로 방긋 웃는 들꽃처럼
태양을 즐겁게 따라 돌면서
자연의 순리에 따라
털옷도 입었다가 짧은 소매도 입듯이
그렇게 그렇게 인생의 희노애락의 그네에
엉덩이를 앉힌 채 싱그러운 바람을 호흡하면서
평화로운 하루 하루를 지나시면 참 좋겠나이다.

행복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찾으면 되나이다.

저희들과 함께하시는 그 마음과 사랑으로
이 작은 세상을 꼭 품으소서.

그런 다음 우리는 우주의 무한함으로
편안히 진입할 것이나이다.

참으로 크십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2017년 6월
들꽃마을 최영배 비오신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