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상 2016년 12월 -
키 큰 나무도 작은 들꽃들의 햇빛을 다 가리우지 않는데
사람들은 약자들의 가진 것 마저 빼앗으려 듭니다.
사랑의 님이시여,
여름 어느 날
큰 나무 그늘 아래에서 시원한 휴식을 취하면서
손에 잡힐 듯한 작은 들꽃들의 웃음소리를
들으신 적이 있나이까?
뜨거운 그 어느 여름날
얕은 실개천의 큰 바위 아래에서
연약한 송사리들의 즐거운 생명의 소리를
들으신 적이 있나이까?
거대한 태양이 지구를 태우지 않고
오히려 생명을 되살리고 있는 사랑을
가끔이라도 느끼고 계시나이까?
이렇듯이 자연과 우주는 자신의 거대한 힘과 능력을
공격적으로 쓰지 않고 연약한 생명들과 함께
공존하는 지혜와 겸손을 지니고 있나이다.
하오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자연과 우주의 공존과 상생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강자에 의해 약자가 파괴되는 역(逆)한 현상들을
체험하고 있나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지구의 교만이 태양의 겸손을 이길 수 없으며
큰 나무의 위용이 작은 들꽃들의 웃음을 꺾을 수 없듯이
권력과 재벌들의 엄청난 힘과 거만도
하루 24시간을 힘겹게 살아가는
대다수 국민들의 생명력을 이길 수는 없나이다.
만약 거목이 햇볕을 다 가리우고
개천의 큰 바위가 송사리의 생존을 계속 위협한다면
태양이 분노하여 빌딩의 제일 위 층을 불태우고
홍수가 일어나 큰 바위를 구르게 할 것이나이다.
인간의 힘은 관계의 교환에서 나오며
창의의 능력은 관계의 사랑에서 분출되나이다.
우리는 이제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하거나
기대할 희망을 잃어버렸나이다.
너의 손을 잡고 싶은데
나의 손을 잡아 줄 사람이 보이지 않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은데
이웃집 아파트의 현관문을 비밀번호 때문에
열 수가 없나이다.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깜빡거리는 사거리 신호등 한복판에 서서
애꿎은 담배연기만 뿜어내고 있나이다.
이렇듯이 방황하고 있는 우리들의 이정표는
각계지도층들의 헌신과 희생뿐임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나이다.
하오나 님이시여,
안타깝게도 십자가 꼭대기 지붕 아래에 사는 종교인들마저
희생과 헌신의 아픔대신 세속적인 화려함으로
십자가의 붉은 색을 금색으로 바꾸고 있으니
마지막 끄나풀을 놓아야 하는 처절한 절망 아래로
구르고 있는 심정이나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닻을 거두어서는 아니되나이다.
이 세상과 우주에서
가장 큰 힘이 바로 생존의 의지이며
자유와 정의의 살아있는 법칙이나이다.
나의 의지와 우주의 이치가 변하지 않는 한
이 어려운 시기는 지나갈 것이며
지쳐가는 우리에게 희망의 단비를
반드시 뿌릴 것이기 때문이나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의지해야 하나이다.
작은 촛불들이 내 영혼에 기운을 불어넣듯이
서로간의 작은 관심들이 너와 나의 생명에
활기를 되찾아 줄 것이나이다.
강력한 네온사인 아래에서는 촛불이 한없이 연약하지만
어두운 공간에서는 작은 촛불도 큰 역할을 하게 되나이다.
그들이 하지 않으면 우리가 해야 하나이다.
그들이 겸손하지 않으면
우리가 허리를 굽혀야 하나이다.
그들이 희생하지 않으면
우리가 사랑해야 하나이다.
지류(支流)가 합쳐져서 큰 강을 만들듯이
모세혈관이 모여서 동맥과 정맥에 피를 흐르게 하듯이
너와 나의 작은 헌신과 사랑이
우리 모두의 공동체를 다시 살려낼 것이나이다.
분명 소리가 요란한 사랑은 영혼을 비만하게 하고
소리 없는 사랑은 영혼을 비우게 하나이다.
베푼다는 생각은 영혼을 탁하게 하고
나눈다는 생각은 영혼을 깨끗하게 하나이다.
남아서 주는 자선은 적선이고
모자람 중에 나누는 교환은 사랑이나이다.
그들이 변한다고 내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깨끗하고 풍요로우면 나는 행복하나이다.
작은 빗방울이 화가 나면 폭풍우가 만들어지듯이
너와 나의 작은 사랑이 모이면 큰 강물이 되어
세상의 온갖 쓰레기들을 깨끗하게 청소해 낼 수 있나이다.
참으로 사랑하는 님이시여,
아무리 힘들고 어려우시더라도
사랑의 끈을 놓아서는 아니되나이다.
왜냐하면 님의 이 작은 사랑의 끈이
우리 사회 전체 공동체가 먹고 사는
젓줄이기 때문이나이다.
편안한 시기에 작은 사랑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어두운 시기에 작은 사랑은 너와 나를 살려내는
공동체의 산소호흡기와 같은 역할을 하나이다.
지금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공중의 새들이 땅을 보고 꾸짖으며
보이지 않는 들꽃들이 시내 가로수에서 소리를 지르며
바다와 강 속의 고기들이 육지로 모여들고 있나이다.
겸손과 희생의 님이시여,
님께서는 오늘날의 산소호흡기이나이다.
초라한 말구유에 다가가시어
님의 따뜻한 호흡으로 추위에 떨고 계시는
아기예수님을 보호해 주소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2016년 12월
들꽃마을 최영배 비오신부 드림